본문 바로가기
역사, 문화, 인물/대서양; 유럽, 아메리카, etc.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정치 체제와 생활상

by 소하리바 2021. 5. 3.

 

상고기는 기원전 8세기경부터 기원전 480년 제 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까지의 기간을 뜻한다. 천여 개의 폴리스가 지중해와 흑해 연안에 생겼던 시기였으며 상업이 흥성했다.

귀족과두제

기원전 8세기경 대부분의 폴리스는 왕정 폐지 후 귀족과두제를 수립했다. 당시 전쟁에서는 기병의 역할이 중요했기에 그리스의 군사력은 전차, 말, 무구 등을 갖추고 관리할 수 있는 재력을 가진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공동체를 지키는 존재였으므로 절대적인 정치적 권한을 누렸다. 또한 넓은 토지를 소유한 이들이 귀족이라는 이름으로 정권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상고기의 귀족들은 향연, 와인, 시, 춤, 고급창녀, 남성동성애로 이루어진 엘리트 남성 중심의 독특한 문화를 영위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여성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으므로 인간 사이의 진실된 감정을 가지기 위해서는 남성들끼리 사랑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와 같은 호모 소셜 속 동성애는 나이가 있는 남성이 어린 남성과 성관계를 가지면서 사회화를 돕는 맥락으로 향유되었다. 이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귀족은 한정되어 있었다.

중장비보병(호플리트)

기원전 7세기경 중장비보병 전술이 도입되면서 그리스 사회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중장비보병은 이전의 귀족들과 달리 창칼과 방패, 몸통 갑옷, 투구, 손목받이와 정강이받이를 착용했다. 이들은 전투 시 8열 종대로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밀집대형을 이루어(팔랑크스) 싸웠는데, 전술 특성상 연대와 단결력이 매우 중요했다.

이들 역시 자신이 무구를 마련해야 했지만 그 부담은 이전 전차부대보다는 훨씬 적은 것이어서, 군대에 참여할 수 있는 집단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또한 폴리스 방어에 중장비보병이 필수적인 존재가 되어감에 따라 귀족 외의 더 많은 이들에게 정치적 권한을 보장해주어야 했다.

참주정의 등장

엘리트 남성 중심의 향락적인 귀족 문화에서 배제된 주변부 귀족들은 불만을 갖고 중장비보병 출신의 중산층과 협력하여 정치적 변혁을 꾀하게 되는데, 전통적인 헌정 체제를 탈피해 권력을 장악한 이들을 참주(tyranos)라 불렀다. 이들은 중산층의 도움을 받았기에 권력을 쥔 후에도 이들의 권리를 확대해줄 수밖에 없었다. 참주제는 대개 짧은 기간으로 끝났지만 참주정을 거치면서 기원전 500년경 이후 많은 폴리스에서 급진적인 정치개혁이 일어났다. 아테네의 경우 확대된 중산층의 권력은 민주정을 향한 발판이 되었다.

아테네

아테네는 청동기 시대 이래로 존속한 유일한 폴리스라는 자부심을 지닌 폴리스로, 경작지가 부족한 아티카 지방에 위치했다. 아테네는 본디 농업 중심 사회였으나 이후 에게 해를 향해 뻗어나가며 발전하게 된다.

아테네의 귀족정

기원전 8세기 중기부터 귀족과두제가 수립되었다. 행정, 사법, 군사에 관한 최고권은 매해 민회에서 선출되는 아르콘이 행사했다. 기원전 638년경에는 9명의 아르콘에 의한 집단지도체제가 확립되었다. 왕정 시대부터 존속한 아레오파고스라는 귀족회의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기원전 7세기 후반, 아테네는 쇠락하여 시민의 상당수가 채무노예로 전락할 정도였다. 한편 중장비보병의 역할이 중요해지면서 중농, 부유한 상인, 수공업자 등 중산층의 정치적 발언권이 커졌다. 기원전 621년 드라콘의 성문법으로 귀족의 권한이 제한되었지만 농민의 생활상태는 개선되지 않았고 도시 중산층 역시 좀더 가시적인 정치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솔론의 금권정치

위와 같은 사회적 기대를 배경으로, 기원전 594년 아르콘으로 선출된 솔론은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귀족의 권력 남용을 제한하고, 토지 소유의 상한도 정했다. 또한 정치적 참여 기준을 혈통이 아닌 재산 수준으로 교체하고자 했는데, 시민 계급을 재산 수준에 따라 네 계급으로 나누어 계급별로 정치적 위상을 규정했다.

채무노예제도를 금지하여 시민이 스스로를 노예로 팔 수 없도록 하고, 외국으로 팔려간 채무노예 송환을 위한 기금도 조성했다. 새 회의체를 창설해 중산층의 정치참여를 허용했으며, 하층계급에게 민회 참여권을 주고 민회에 아르콘의 선거권을 부여했다. 또한 배심원 제도를 수립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올리브와 포도 등 환금성 작물의 재배와 도자기, 기름 생산, 선박 건조 등 도시공업을 진흥시키는 동시에 무역과 산업을 진흥시켜 새로운 활로를 찾고자 했다.

솔론의 이러한 개혁은 저마다의 이유로 각 계층의 반발을 샀고 그 불만 속에서 참주정치로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치 (기원전 546-527년)

귀족 출신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평야파와 해안파의 분쟁에서 농촌의 가난한 산지파를 이끌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귀족과두제를 무너뜨리고 참주제를 수립했다. 그는 귀족의 아들들을 인질로 잡는 등 노골적인 쿠데타 방식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그의 정치는 이른바 계몽군주정치로, 귀족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시민을 위한 제도를 마련했다. 공공토목공사로 취업기회를 확대하고, 비극 경연 대회와 디오니소스 제전 등을 통해 고급 문화를 민중에게도 제공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 권력을 차례로 이어받은 두 아들이 좋지 않은 최후를 맞으면서 참주정은 막을 내렸다.

클레이스테네스 개혁 (기원전 507년)

보수세력은 솔론의 자유화 노선을 백지화시키려 했지만 자유주의자들과 대립 끝에 패배하면서 클레이스테네스가 과감한 개혁에 착수했다. 아테네의 민주정은 이때 비로소 꽃피게 된다.

그는 참정권 확대를 원하는 평민들의 지지로 기원전 508년 집권했다. 이 시기 아테네의 정치는 '시민의 자기지배'로 요약된다.

우선 기존의 혈연 중심 4부족이 지연 중심 10부족으로 개편되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티카 지방을 아테네 시, 해안 지역, 내륙 지역으로 3분하고 각각을 10등분했다. 이렇게 30개로 나뉜 중간행정구를 트리에티스라고 했는데, 도시-해안-내륙 트리에티스 하나씩을 묶어 3 트리에티스를 1개의 행정부족으로 개편했다. 이를 통해 폴리스와 시민을 위한 정책 수립이 가능해졌다.

또 클레이스테네스는 도시와 농촌을 데메스라는 기본행정조직으로 구분하여 시민권의 기본 단위로 삼았다. 150개 데메스에 거주하는 18세 이상 남성은 등록을 해야 시민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여성들도 시민으로 등록을 하기는 했지만 남성들과 같은 의미는 아니었다. 다만 이것이 나중에 중요해지는데 나중에 시민의 자격을 볼 때 어머니의 신분을 따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편을 바탕으로, 법령시민권과 최고행정권을 행사하는 주요 정치기관인 5백인회가 만들어졌다. 각 데메스의 30세 이상 남성 시민 후보자 중 부족 별로 50명씩을 추첨해 총 500명을 뽑아 1개월간 국가행정을 관장했다. 5백인회는 연임이 불가능하게 하여 모든 (남성) 시민이 정치를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프리타네이스라는 조직도 있었는데 이는 부족 별 50명씩을 차출하고 이중 50명씩 1년의 1/10씩을 맡도록 하는 실행위원회였다. 프리타네이스에서 매일 한 명씩을 추첨하여 24시간 동안 국가원수의 직함도 주었다.

최고기관인 민회의 범위와 권한도 확대되었다. 18세 이상 모든 남성 시민으로 구성되었으며, 한 달에 한 번 열렸다. 5백인회가 상정한 의견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권한을 맡았다. 

군사개혁도 단행되어 군사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기원전 500년경 창설된 군사위원회는 10부족에서 1명씩 선출된 임기 1년의 군사위원인 스트라테고이 1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다른 정치조직에 비해 이례적으로 임기가 긴 것이었고 심지어 재선도 허용되었는데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한 다른 정치조직과는 달리 군사 부문은 전문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참주와 같은 독재 리더의 출현을 방지할 목적으로 도편추방제가 만들어졌다. 시민의 자유를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인물에 대해 비밀투표를 실시하고, 6천 표 이상 득표하면 국외로 10년간 추방되었다. 6천 명은 당시 시민의 20~30% 정도다. 민주적이라 여겨지는 제도이지만 발굴된 도기 파편을 보면 부정선거의 흔적도 남아 있어 이 제도의 공정성은 상상한 것만큼 높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배심원 제도도 개정되었다. 현안에 따라 중대 사안은 1001명, 그보다는 덜한 경우 501명, 사소한 사안은 201명의 배심원이 판결을 내렸다. 홀수는 동수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배심원은 투표 시작 전 마지막 순간에 랜덤으로 결정되어 매수를 방지하고자 했다.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기원전 5세기경 완성되었는데 이는 노 젓는 일꾼으로 활약한 제 4계급 테테스가 발언권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스파르타

스파르타는 기원전 9세기경 라코니아 지방을 침략해 정착한 후 발전한 폴리스였다. 정치제도를 계속해서 크게 바꾸면서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던 아테네와 달리 스파르타는 오래도록 비슷한 체제를 안정적으로 운영했고 해당 지역의 패권을 쥐고 있었기에 당시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폴리스였다. 

군국주의 스파르타의 확립 배경

투키티데스의 기록에 따르면 군국주의적이고 강압적인 스파르타의 체제는 기원전 9-8세기쯤 시작되었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스파르타 체제가 기원전 600-550년쯤에 성립되었거나 장기간의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확립되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스파르타의 사회 체제 개혁은 스파르타인 전체의 사회적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스파르타가 정착한 라코니아 옆에는 토지가 비옥한 메세니아라는 곳이 있었다. 스파르타와 메세니아 사이에는 여러 가지 사건으로 인해 원래부터 적대감이 있었는데 스파르타는 자신들의 과잉 인구 문제를 해결하고 풍요로운 농지를 확보하기 위해 기원전 735년경 메세니아를 침공하여 20년 가량의 전쟁 끝에 메세니아를 점령했다. 스파르타인들은 메세니아인을 노예로 부리며 착취했다.

이후 메세니아인은 압제와 착취에 맞서 두 번에 걸친 독립전쟁을 일으켰는데, 기원전 650년경에는 펠로폰네소스의 반스파르타 세력의 후원 아래 제2차 메세니아 독립전쟁을 일으켰지만 30년간의 항쟁 끝에 재점령되었다. 메세니아인은 토지를 몰수당하고 지도자들은 사형되거나 추방당했으며, 이러한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스파르타인들은 반란에 대한 거의 무조건적이고 집착적인 불안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전쟁의 승리에 크게 기여한 비 귀족 서민 계층들이 귀족과 맞먹는 권리를 요구하는 등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자 스파르타의 귀족들은 사회 체제 개편에 동의했다.

스파르타의 과두정

스파르타의 정치 체제는 왕 2명이 군사 지휘관으로서 공동 통치를 하지만 실질적 정치 권력은 원로회의 게르시아가 장악한 과두정이었다. 게르시아는 종신직 3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60세 이상의 장로 중 선출했고 왕 2명도 포함하였다. 즉 실질적인 원로는 28명이었다. 게르시아는 국가 행정을 감독하고 법령과 안건을 제안하며 주요 소송사건들의 판결권도 지니고 있었다.

민회 아펠라는 재력이 있는 30세 이상의 스파르타 시민이 참여하는 기구로서 왕이나 원로회의의 안건을 인준하거나 거부할 권리가 있었다. 아펠라는 관리를 선출하고, 국가 중대사도 표결로 결정할 권한을 지녔다.

왕권을 견제하고 왕보다도 큰 권한을 가지는 에포르스는 임기 1년의 일종의 감독관으로서, 제한 없이 연임이 가능했다. 민회가 60세 이상 장로 중에서 5명의 에포르스를 선출했다. 이들은 원로회의와 민회를 주재했으며 시민생활을 검열했다. 또한 각종 사안에 관한 권한과 입법 거부권도 행사했고 신생아를 양육할지 말지에 대한 여부도 결정했다. 노예 반란에 대비하는 비밀경찰인 크립테이아를 감독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이와 같은 체제는 매우 효율적이었으며 이러한 스파르타의 정치적 안정과 군사력은 당대 그리스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스파르타의 생활상

스파르타의 시민들은 상호 간에 철저히 평등했으며, 기원전 7세기의 시인 알크만에 의하면 다른 폴리스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여성이 사회적으로 존중되고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생활상 자체는 몹시 보수적이고 엄격하여 자유가 제한되었는데, 이런 문화에서의 여성 생활상이 다른 자유로웠던 폴리스의 여성 생활상보다 훨씬 나았다는 것에서 당대 그리스 지역에서의 심각한 수준의 여성차별을 알 수 있다.

스파르타에서 시민은 총인구의 극히 일부인 약 1만 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전체가 귀족이었으며 정복자의 후손들이었다. 주로 농업에 종사하였으나 실질적인 경작은 노예들이 전담했고 시민들은 오로지 군사와 정치에만 관계했다. 스파르타에서 시민의 의무란 다른 계급들을 지배하고 폴리스를 지키기 위해 일생 내내 군대에서 복무하며 일정한 생산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태어난 아이들은 에포르스의 판단 하에 건강한 아이들만 남기고 허약한 아이들은 버렸다. 물론 당시 그리스 지역에서 영아살해는 흔한 것이었지만 스파르타의 경우에는 그 판단 권한이 국가에 있었다. 아이들은 7세 때 아고게라는 기관에 입소하여 단체생활을 했고, 신체단련을 하는 한편 온도 변화나 굶주림에 적응하는 연습도 해야 했다. 아이들은 성별에 따라 12세부터 다른 훈련을 받았다. 남아들은 모두 중장비보병으로 훈련되었으며 여아들은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체력단련을 시켰다.

그러나 다소 억압적으로 보이는 아고게는 당시에 매우 혁신적인 기관이었는데 시민들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 읽고 쓰는 교육을 받았다. 시민 전반을 상대로 한 이러한 공교육 시스템은 근대의 국가에서도 보기 어려운 것이다.

남성들은 20세가 되면 정규군이 되어 60세가 될 때까지 복무했으며 철저한 공동생활로 항상 함께 식사를 했다. 부부는 서로의 얼굴도 잘 몰랐고 순결은 전혀 신성시되지 않았다. 국가는 시민들에게 노예와 토지를 배당해 식량을 생산하도록 했다.

페리오이코이라는 반(half)예속적인 계급은 라코니아 일대의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로서, 주로 상공업에 종사했다. 이들은 납세를 하고 군복무의 의무를 진 자유민으로서 지방도시에서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체 폴리스에 대해서는 참정권이 없었다. 페리오이코이들은 스파르타 시민들이 받는 혹독한 훈련을 받지 않아도 되었기에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가장 안락하고 편안한 생활을 한 계급이었다.

노예는 헬리오타이로 불렸는데, 피정복민들로서 국가의 소유였기에 해방될 수도 매매될 수도 없었다. 이들은 국가에 의해 토지와 함께 시민들엑 배당되었고, 가정을 꾸리거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재산을 소유할 수는 있었지만 철저히 착취당하고 탄압받는 계층이었으며 반란 혐의를 받는 경우 그 자리에서 즉결처형되었다.

스파르타는 외부와 문화적 교류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상당히 고급스러운 문화를 향유했다.

라코노필리아

생존과 안위가 가장 중대한 사안이었던 고대인들에게 스파르타의 강건한 체제와 흔들림 없는 국가적 힘은 당대 사람들에게 추앙의 대상이었으며 숙적인 아테네인들도 스파르타를 이상적인 폴리스로 여겼다. 이렇게 스파르타와 스파르타의 문화, 정치 체제에 대한 애호를 두고 라코노필리아라고 한다. 여러 그리스의 철학자들, 특히 플라톤주의자들은 스파르타가 돈과 교역에 물들지 않은 강건한 이상적 폴리스라고 보았다.

다만 금욕적이고 폐쇄적인 체제를 가진 스파르타는 체제 속 질서를 지킬 수는 있었지만 그리스 지역의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기는 어려웠다. 스파르타의 시민권은 혈연을 기준으로 세습되었고 건강한 아이들만을 남기고 죽였기 때문에 기원전 400년경에 오면 스파르타의 시민 수는 1/10 수준으로 급감하여 노예인 헤일로타이의 인구가 시민 수를 훨씬 압도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스파르타는 시대적인 변화와 발전 속에서 이를 따라잡지 못했고, 수백 년 동안 그리스 지역에서 패권을 쥐었지만 점차로 자연스럽게 쇠락해갈 수밖에 없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