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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문학/텍스트 번역

[번역] 존 M. 쿳시 -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사 <He and His Man>

by 소하리바 2021. 6. 15.
 

The Nobel Prize in Literature 2003

The Nobel Prize in Literature 2003 was awarded to John M. Coetzee "who in innumerable guises portrays the surprising involvement of the outsider".

www.nobelprize.org

하지만 내 새로운 일행에 대해 소개해보겠다. 나는 녀석이 있어 정말 좋았고, 그를 쓸모 있고 손재주 있고 내게 도움이 되도록 하는 모든 것을 녀석에게 가르치는 것을 내 일로 삼았는데, 특히 녀석이 말을 할 수 있도록 그리고 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가르쳤으며, 녀석은 그곳에서 가장 적절한 모범생이었다.

— 대니얼 디포, 로빈슨 크루소

 

그의 사람이 적기를, 링컨셔 해안가의 보스턴은 멋진 마을이다. 그곳에선 잉글랜드에서 가장 높은 교회 첨탑을 볼 수 있는데 항해사들은 그걸 보고 길을 찾는다. 보스턴은 휀[각주:1]에 둘러싸인 고장이다. 여기엔 알락해오라기가 아주 많이 사는데, 이 불길한 새들은 2마일 밖에서 총소리로 들릴 만큼 육중한 신음소리를 낸다.

그의 사람이 적기를, 그 휀은 다른 새들 그러니까 오리와 청둥오리, 쇠오리와 홍머리오리의 서식지이기도 하다. 습지의 남자들, 다시 말해 습지꾼들은 이 새들을 잡기 위해 그들이 유인용 오리나 미끼오리라고 부르는 길들여진 오리들을 키운다.

휀은 습지다. 유럽 전역에, 전 세계에 습지가 있지만 휀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은 아니다. 은 영단어다. 이주해가지 않을 것이다.

그의 사람이 적기를, 이 링컨셔 미끼오리들은 미끼 연못에서 길러지고, 사람 손에서 먹이를 얻어먹으며 계속 길들여진다. 그러고 때가 되면 이 새들은 홀랜드와 독일로 보내진다. 홀랜드와 독일에서 이 새들은 동족을 만나 네덜란드와 독일 오리들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지, 그쪽의 강들은 겨울에 어떻게 얼고 땅들은 어떻게 눈에 뒤덮이는지를 보고, 자기네가 떠나온 잉글랜드가 얼마나 다른지 그 새들에게 그 새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알려준다. 잉글랜드 오리들은 영양가 있는 먹이가 넘쳐나는 해안가와, 만을 자유롭게 들락거리는 조수를 갖고 있고, 강들, 봄들, 개방된 연못과 비바람이 들이치지 않는 연못들, 이삭 줍는 사람들이 남겨 둔 옥수수로 가득한 땅들을 갖고 있으며, 서리나 눈, 뙤약볕으로부터는 자유롭다.

그의 사람이 적기를, 오리들의 언어로 만들어진 이 표현들을 통해 유인용 오리들 또는 미끼오리들은 엄청난 숫자의 새들을 모아서, 말하자면, 이들을 납치해온다. 녀석들은 이들을 안내해 홀랜드와 독일로부터 바다를 건너고 링컨셔의 휀에 있는 자기네의 미끼 연못에 정착하게 하는데, 그들에게 바로 이 연못이 자기네가 말한 연못이며 이곳은 그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곳이라고, 그들만의 언어로 항상 재잘재잘 떠들어 댄다.

녀석들이 매우 바쁜 이 사이 녀석들의 주인인 미끼꾼들은 휀에 갈대로 만들어 놓은 덮개 또는 은신처로 기어들어가서는 물 위에 몰래 옥수수 한 줌을 뿌리는데, 유인용 오리들 또는 미끼오리들은 이 옥수수를 따라오고, 외국에서 온 자기네 손님들을 뒤에 주렁주렁 달고 온다. 그렇게 녀석들은 자기네가 잉글랜드에서 얼만큼 잘 살고 있는지를 쉬지 않고 외쳐 대며, 이틀에서 사흘에 걸쳐서 점점 더 좁은 물길을 따라, 위에 그물이 쳐진 곳까지 자기네의 손님들을 인도한다.

그러면 미끼꾼들은, 미끼 개들을 푼다. 이 개들은 새를 따라 짖으면서 헤엄치도록 아주 잘 훈련되어 있다. 이 끔찍한 생명체의 등장에 소스라치게 놀란 오리들은 곧바로 날개를 펼치지만, 그 위에 아치 모양으로 펼쳐져 있는 그물 때문에 계속 물 속에 처박히고, 그물 아래서 헤엄치거나 비명횡사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물은 점점 주머니의 주둥이마냥 좁아지고, 그 끝에서는 미끼꾼이 서서는 포획물을 하나하나 꺼낸다. 미끼오리들은 쓰다듬을 받지만, 녀석들이 데리고 온 손님들은 그 자리에서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털이 뽑혀 수백수천씩 팔려간다.

그의 사람은 이 모든 소식을,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전날마다 그가 펜나이프로 날카롭게 다듬어두는 깃펜으로 깔끔하고 빠르게 적는다.

그의 사람이 적기를, 핼리팩스에는 제임스 1세 때 사라진 처형 장치가 우뚝 서 있었는데, 그건 다음과 같이 작동했다. 사형수가 처형대의 가로대 위에 머리를 대고 누우면 사형집행인이 무거운 칼날을 지탱하고 있던 핀을 뽑는다. 이 칼날은 교회 문짝만큼이나 높게 솟은 틀을 따라 뚝 떨어져서 사형수를 도살자의 칼처럼 깔끔하게 참수해 버린다.

그러나 핼리팩스에는 핀을 뽑고 칼날이 떨어지는 그 사이에 벌떡 일어서서 사형수가 사형집행인에게 붙잡히지 않고 언덕을 뛰어내려가 강을 헤엄쳐 건넌다면 풀려날 수 있다는 관습이 있었다. 하지만 핼리팩스에 그 장치가 서 있는 동안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지금은 그의 사람이 아니라 '그'다) 브리스톨의 물가에 위치한 그의 방에 앉아 이 글을 읽는다. 그는 나이가 들어 가고 있는데 지금쯤이면 거의 노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의 얼굴은 열대 지방의 태양에 까맣게 그을렸는데 종려나무와 팰밋나무 잎으로 양산을 만들어 그늘을 드리우기 전에 그렇게 된 것으로, 지금은 조금 창백해졌지만 아직 양피지처럼 거칠었다. 그의 코에 남은 햇빛에 데인 화상 자국은 낫지 않을 것이다.

그가 방 구석에 가져다 둔 양산은 아직 곁에 있지만, 그와 함께 돌아왔던 앵무새는 세상을 떠났다. 불쌍한 로빈! 그 앵무새라면 그의 어깨를 횃대 삼아 앉아선 꽥꽥댔을 것이다. 불쌍한 로빈 크루소! 불쌍한 로빈을 누가 구할까? 그의 아내는 날이면 날마다 이어지는 앵무새의 한탄을 견디질 못했다. 내 그것의 목을 비틀어 버릴 거야. 하지만 아내에게 그럴 용기는 없었다.

앵무새와 양산, 그리고 가슴 가득히 보물을 안고 섬에서 잉글랜드로 돌아왔을 때, 그는 헌팅던에 땅을 사서 그의 늙은 아내와 함께 한동안 평온하게 살았는데, 그는 부자가 되었고, 그의 모험에 대한 책을 출판한 뒤에는 더 부유해졌다. 그러나 섬에서의 세월 그리고 그가 부리던 프라이데이와 여행하던 세월은 그로 하여금, 정착한 신사의 생활에 지루함을 느끼게 했다. (그는, 불쌍한 프라이데이, 꽥꽥, 하고 스스로 한탄한다. 앵무새가 그의 이름만 말할 수 있지 프라이데이의 이름은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결혼 생활도 다소 실망스러웠다. 그는 자신이 점점 더 마구간으로, 기르던 말들에게로 도피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말들은 정말 고맙게도 그가 마구간에 왔을 때 그를 알아본다는 의미로 부드럽게 히힝 소리를 내고 나서 다시 평화를 되찾을 뿐, 수다를 떨지 않았다.

프라이데이가 오기 전까지는 고요한 생활을 했던 그 섬에서 돌아온 후로, 그가 느끼기엔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말(言)들이 있는 것 같았다. 침대에서 아내 옆에 누우면 끊임없이 부스럭대고 덜커덩거리는 자갈들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는 그저 잠에 들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늙은 아내가 죽었을 때 그는 흐느끼긴 했지만 애석해하지는 않았다. 그는 얼마 뒤 아내를 묻었고, 헌팅던의 땅은 아들에게 주고 브리스톨의 부둣가에 있는 즐거운 선원(The Jolly Tar)의 이 방을 구했는데, 그를 유명인사로 만든 섬에서 가져온 양산, 횃대에 고정시켜 둔 죽은 앵무새 그리고 몇 가지 필수품만 가지고 왔으며, 그 후로 쭉 혼자 살았던 것인데, 낮에는 선착장을 거닐고 파이프 담배를 피우면서 아직도 예리한 눈빛으로 바다 건너 서쪽을 응시했다.

그는 읽지 않았는데 읽는 재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모험을 적어내려갔던 탓에 그에게 글쓰기는 습관이 되었는데 이것은 충분히 즐거운 오락거리였다. 저녁이 되면 그는 촛불을 켜고 종이를 꺼낸 뒤 펜촉을 날카롭게 다듬고는 그의 사람—그러니까 링컨셔의 미끼오리, 끔찍한 칼날이 떨어지기 전에 벌떡 일어나 언덕을 달려 내려오면 탈출할 수 있는 핼리팩스의 커다란 죽음의 장치, 그리고 다른 수많은 것들에 대한 보고를 보내주는 그 남자—에 대해 두어 페이지 정도를 쓸 것이다.

항구의 벽을 따라 걸으면서 핼리팩스의 장치에 대해 생각하던 로빈앵무새가 '불쌍한 로빈'이라고 부르곤 했던—은, 자갈을 떨어뜨리고 귀를 기울인다. 자갈이 물을 때리는 데에는 일 초, 또는 그보다 짧은 시간이 걸린다. 신의 은총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정도로 빠르지만, 불에 단련된 강철로 만들어졌고 자갈보다 무거우며 수지로 기름칠이 된 커다란 칼날이 신의 은총보다 더 빠르지 않을까? 우리가 어떻게 거기서 탈출한단 말인가? 그리고 대체 어떤 종류의 사람이 이렇게 바삐 나라를 가로질러 여기저기로, 하나의 죽음의 장관에서 다른 죽음의 장관까지—곤봉으로 패는 것에서 목을 베는 것까지— 다 적어서 보고를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사업가, 하고 그가 생각한다. 잡곡상이나 가죽 상인 같은 사업가인 것으로 하자. 아니면 점토가 풍부한 곳에서 나는 기와를 생산하는 업자거나 조달하는 업자라고, 그리고 그 고장은 와핑으로 하자. 그렇다면 장사를 위해 여행을 많이 다녀야 할 것이다. 그에게, 그를 사랑하고, 너무 수다스럽지 않고, 그에게 자식들을—주로 딸들을— 많이 낳아주는 아내를 주어서 그를 좀더 풍요롭게 만들고 합당한 행복을 준다. 그리고 그의 행복을 갑자기 끊어버리는 것이다. 어느 겨울 템즈 강이 범람해 기와를 굽는 가마 또는 잡곡점 또는 가죽 공장이 떠내려간다. 그는, 그의 사람은 폐인이 된다. 파리떼나 까마귀떼처럼 몰려드는 빚쟁이를 피해 집과 아내, 자식들을 떠나 '거지들 길(Beggars Lane)'에서 가장 비참한 곳에 숨어들어가 가짜 이름과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파랑(波浪), 이 파멸, 이 탈출, 이 가난, 이 누더기 옷, 이 고독—, 이 모든 것들을, 난파선과, 로빈이 거의 미쳐버릴 때까지 26년 동안 그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켰던 (정말이지 어느 정도라도 그가 미치지 않았었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섬의 모습이 되도록 하자.

아니면 그를 화이트채플에 집과 가게와 창고를 두었고 턱에 점이 있는 마구(馬具) 업자, 그러니까, 그를 사랑하고, 너무 수다스럽지 않고, 그에게 자식들을—주로 딸들을— 많이 낳아주는 아내가 있는 마구 업자라고 쳐 보자. 런던 대화재가 아직 닥치지 않은 1665년 역병이 도시를 덮칠 때까지 말이다. 역병이 런던을 덮친다. 매일 교구마다 빈부를 가리지 않고, 역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그가 가진 재산은 그를 구해주지 못한다. 그는 아내와 딸들을 시골로 보내고는 도망칠 계획을 세우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성경을 아무렇게나 펼쳐 나온 구절을 읽는다.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각주:2]

이 안전한 구절의 징조[각주:3]에서 용기를 얻은 그는 런던에 남아서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나는 거리에서 군중을 만났는데 —그가 적는다— 그 가운데 한 여자가 하늘을 가리켰다. 봐요, 여자가 울부짖는다. 하얀 옷을 입은 천사가 불타는 검을 휘두르고 있어요! 그리고 군중은 전부 자기네들끼리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 그렇군, 그들이 말한다. 칼을 든 천사야! 하지만 그는, 그러니까 마구 업자는 천사도 검도 볼 수 없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태양빛 때문에 한쪽이 다른 쪽보다 밝은, 이상하게 생긴 구름 하나뿐이다.

이건 상징입니다! 그 여자가 거리에서 울부짖는다. 하지만 그는 그의 삶에서 상징을 볼 수 없다. 보고서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른 날에는, 본디 마구 업자였지만 지금은 직업이 없는 그의 사람은 와핑의 강가를 거닐다가, 작은 어선 위에서 노를 젓는 남자를 한 여자가 자기 집 문을 열고 나와 부르는 것을 관찰한다. 로버트! 로버트! 여자가 외친다. 그 남자는 강가를 따라 노를 저어서, 배에서 자루 하나를 집어들어 강가의 바위 위에다 얹어 두고 다시 노를 저어 가고, 여자는 강변을 내려와서 굉장히 침울한 얼굴로 주머니를 집어들어 집에 들고 간다.

그는 로버트에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 로버트는 그에게 그 여자가 자기 아내이고, 그 자루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먹을 고기, 빻은 곡식, 버터 따위의 물자가 일주일 치 들어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역병을 옮길까 봐 아내에게도 아이들에게도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며, 그것이 그의 마음을 찢어지게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외쳐 부르며 교감하는 로버트와 아내 그리고 물가에 남겨진 자루는— 그것 자체로 존재하지만, 로빈슨이 파도 너머 잉글랜드에 남겨진, 자기가 사랑했던 모든 것에게 자신을 구해 달라고 외쳤던, 또는 물자를 찾아 난파선으로 헤엄쳐 갔던 가장 어두운 절망의 나날을 보낸 그의 섬에서의 그의 고독의 모습으로도 존재한다.

비통했던 그 시절에 대한 보고는 더 있다. 역병의 증상대로 사타구니와 겨드랑이가 부어오르는 고통을 더 이상 참지 못한 한 남자는 홀딱 벗은 채로 길거리로, 그의 사람인 마구 업자가 그를 목격하는 화이트채플의 해로우 앨리로 뛰쳐나온다. 그 남자는 겅중겅중, 펄쩍펄쩍 뛰어 대고 천 가지의 이상한 몸짓을 해 댄다.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울부짖는 남자를 따라 뛰어가면서 돌아오라고 외친다. 그리고 이 겅중거림과 펄쩍거림은 그의 겅중거림과 펄쩍거림에 대한 비유인데, 그는 난파라는 재앙이 닥친 후 배를 함께 탔던 동료들의 흔적을 샅샅이 뒤져 짝이 안 맞는 신발 한 짝을 발견하고는 자신이 홀로 야만적인 섬에 버려져 죽어가게 되었으며 구원의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겅중겅중, 펄쩍펄쩍 뛰어다녔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무엇을 더 비밀스럽게 노래한단 말인가—그가 자문해본다—, 그가 읽은 불쌍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남자를 비밀스럽게 노래하는데 그의 비참함 말고 무엇을 더 노래한단 말인가? 물을 지나, 세월을 지나, 그만의 시적 영감에서 그는 무엇을 부르고 있는 것인가?

1년 전 그는—로빈슨은— 한 선원이 브라질에서 데려왔다는 앵무새 한 마리를 2기니 주고 샀다. 이 새는 그가 애지중지 길렀던 생명체만큼 아주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훌륭했는데, 초록색 깃털과 진홍색 머리깃을 가지고 있고, 선원의 말을 믿어보자면 말도 잘하는 새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 새는, 여관에 있는 그의 방에서,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채운 사슬을 다리에 달고 자기 횃대에 앉아서는, 그가 어쩔 수 없이 새의 눈을 가려야 할 때까지 계속해서 불쌍한 폴! 불쌍한 폴! 하고 외친다. 하지만 불쌍한 로빈! 같은 다른 단어를 배우진 못하는데 아마도 그걸 배우기엔 너무 나이가 든 것일지도 모른다.

불쌍한 폴은 좁은 창을 통해 돛대 끄트머리 너머, 그 너머의 너머, 대서양의 회색빛 파도 너머를 바라본다. 이곳은 무슨 섬이야, 불쌍한 폴이 묻는다. 내가 오게 된, 너무나 춥고 너무나 따분한 이 섬 말이야. 나의 구원자, 당신은 내가 그렇게나 필요로 할 때 어디에 있었던 거야?

늦은 밤 술에 취한 한 남자가 (그의 사람의 또다른 보고다) 크리플게이트[각주:4] 출입구에서 곯아떨어진다. 시체 수레가 오고 있고 (우리는 아직 역병의 시대를 보고 있다) 이웃들은 그 남자가 죽은 줄 알고 다른 시체들과 함께 수레에 태운다. 수레는 머지않아 마운트밀에 있는 시체 구덩이에 다다르고, 악취 때문에 얼굴에 천을 덮어쓴 수레꾼이 그를 던져넣기 위해 그를 잡는다. 그러자 그가 깨어나서는 놀라 몸부림친다. 여기가 대관절 어디오? 그가 말한다. 당신 시체들이랑 같이 묻힐 뻔했소, 수레꾼이 말한다. 아니 그러면 내가 죽은 거요? 남자가 말한다. 그리고 이것 역시 그의 섬에 있던 그의 모습이기도 하다.

런던 시민 중 몇몇은 자기가 건강하고 이 사태를 잘 지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업을 계속한다. 그의 사람이 보고하길, 그러나 그들의 피 속에는 역병이 몰래 들어 있는데 이것이 그들의 심장에까지 퍼지면 벼락에 맞은 것처럼 그 자리에서 죽어 자빠진다. 그리고 이것은 삶 그 자체, 삶 전체의 형상이다. 응당 해야 할 준비.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응당 해야 할 준비를 하거나 선 자리에서 자빠진다. 마치 그가—로빈슨이—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섬에서 모래에 찍힌 사람 발자국을 발견하도록 되어 있던 것처럼 말이다. 그건 자국이었고, 발의, 사람의 흔적이었다. 하지만 다른 많은 것의 흔적이기도 했다. 너는 혼자가 아니란다, 흔적이 말했다. 그리고 또 말한다. 네가 얼마나 멀리 배를 타고 나가든지, 어디에 숨든지, 너는 발견당하고 말 거야.

그의 사람이 적기를, 역병이 일어난 해에 다른 이들은 겁에 질려 그들의 집, 아내, 아이들까지 모든 것을 버리고 런던에서 가능한 한 멀리 도망갔다. 역병이 지나가고 난 후 그들의 탈출은 모든 면에서 비겁하다고 비난받았다. 그러나, 그의 사람이 적기를, 우리는 역병에 맞서려면 어떤 용기가 필요했는지 잊고 있다. 그것은 무기를 쥐고 적군[각주:5]을 겨냥하는 군인의 용기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창백한 말[각주:6]에 올라탄 죽음을 겨냥하는 것과 같았다.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섬 앵무새 두 마리 중 더 사랑받았던 녀석은 주인으로부터 배우지 않은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앵무새와 같고 그다지 사랑받지 못한 그의 사람은 어떻게 그의 주인만큼, 또는 그의 주인보다 더 글을 잘 쓰게 된 것일까? 재능 있는 펜을 휘갈기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의 사람이다. 마치 창백한 말에 올라탄 죽음을 겨누는 것처럼. 회계사무소에서 배운 그만의 능력은 기록과 장부를 작성하는 데에 있지 문장을 쓰는 데에 있지 않다. 창백한 말에 올라탄 죽음: 그는 이런 표현을 생각해내지 않는다. 그가 그의 사람에게 유일하게 항복할 때는 이런 표현이 등장할 때뿐이다.

유인용 오리, 그러니까 미끼오리는 또 어떤가. 로빈슨이 유인용 오리에 대해서 뭘 알았을까? 그의 사람이 보고를 보내오기 전까진 아무것도 몰랐다.

링컨셔 휀의 미끼오리들, 핼리팩스에 있는 커다란 사형 장치는 또 어떤가. 그의 사람이 보내온 이 위대한 여행의 보고는 마치 브리튼 섬을 개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그가 직접 만든 소형 배를 타고 자기만의 섬을 여행하던 모습이다. 그 여행은 그 섬에 더 많은 면, 그러니까 바위 때문에 험준하고 어둡고 불친절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그에게 보여주었으며, 그는 미래의 식민지 정복자들이 그 섬에 도착해서 그 섬을 탐험하고 정착하게 될 텐데도 나중에 가서는 섬의 그런 면들을 언제나 피하게 되었다. 그것 역시 영혼과 빛의 어두운 면의 모습이다.

표절꾼과 모방꾼 한 무리가 처음으로 그의 섬 이야기에 달려들고 이들이 이 조난자의 삶을 꾸며낸 이야기를 대중에 떠넘겼을 때 그들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의 살덩이, 말하자면 그의 삶에 달려드는 한 무리의 식인종 떼처럼 보였고, 그는 이렇게 말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내가 나를 때려 눕혀 구워 먹으려던 식인종으로부터 나를 지켰을 때, 나는 그것 그 자체로부터 나를 지켰다고 생각했다. 나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그가 적었다. 이 식인종들이 단지 더 악마 같은 탐욕의 형상일 뿐이며 이 형상들이 진실의 순수한 본질을 갉아먹을 것이라고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 더 돌이켜보다 보니, 아류 모방꾼들에 대한 동질감이 그의 가슴에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한다. 이제 그가 보기에 세상에는 한 줌 정도의 이야깃거리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니 젊은이들이 늙은이를 등쳐먹지 못하게 한다면 그들은 영원히 입을 다물고 앉아만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섬 모험 이야기에서, 어느 날 밤 자신이 자신의 섬에서 악마가 거대한 개의 모습을 하고 침대 속 그의 위에 누워 있었다고 확신하고 공포에 질려 깨어났던 것을 이야기한다. 그는 벌떡 일어나 단검을 들고는 좌우로 휘둘러댔는데 그의 침대맡에서 자고 있던 불쌍한 앵무새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러댔다. 많은 시간이 흘러서야 그는 개도 악마도 그의 위에 누워 있지 않았다는 것을 받아들였는데, 마비를 잠깐 앓으며 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을 때에는 오히려 그 위에 어떤 생명체가 몸을 쭉 뻗고 누웠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병의 방문은 아마 악마나, 개 모양을 한 악마의 방문으로 형상화될 수 있겠지만, 그와 반대로, 병의 방문은 마구 업자의 역병 이야기로 형상화될 수도 있다. 그리고 악마나 역병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누구도 위조범이나 도둑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몇 년 전 그가 종이에 그의 섬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 놓기로 결심했을 때 그는, 단어들은 떠오르지 않고 펜은 물 흐르듯 움직이지 않으며 그의 그 손가락들은 뻣뻣하고 다루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그는 점차 글쓰기라는 일에 완전히 숙달되었는데, 얼어붙어 버린 북쪽에서 프라이데이와 함께 모험을 하는 부분을 적을 때까지만 해도 생각을 하지 않고도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아아, 글쓰기의 그 오랜 안락함은 그를 저버렸다. 브리스톨 항구가 보이는 창문 앞의 조그마한 책상에 앉을 때면 그의 손은 서툴게 느껴지고 펜은 마치 한 번도 연주해본 적 없는 악기처럼 낯설다.

다른 남자는, 그러니까 그의 사람은 글을 쓰는 일을 더 쉽게 느낄까? 그가 쓴 오리와 죽음의 장치 그리고 역병이 닥친 런던에 대한 이야기는 꽤 멋지게 흘러가지만 한때는 그의 이야기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그는 그를, 그러니까 턱에 점이 있는 말쑥하고 조그마한 남자를 잘못 판단했을 지도 모른다. 아마도 바로 이 순간 그는 이 넓은 왕국 어딘가의 셋방에 홀로 앉아서 의심과 망설임과 딴 생각에 가득찬 채 펜을 잉크에 적시고 또 적실지도 모른다.

이 남자와 그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주인과 노예로? 형제, 아니면 쌍둥이 형제로? 전우로? 아니면 적군으로, 적[각주:7]으로? 

그는 이 이름 없는 사나이—그가 그의 저녁 그리고 때로는 그의 밤까지 나누는 그, 그리고 로빈슨이 부둣가를 거닐면서 새로 들어오는 배를 기다리고 그의 사람이 그의 시찰을 위해 이 왕국을 쏜살같이 질주하는 낮에만 부재한 그—에게 어떤 이름을 지어 주어야 할까? 

한창 여행 중인 이 남자가 브리스톨에 한 번이라도 오긴 할까? 그는 이 사나이를 직접 만나 악수를 하고, 부둣가를 따라 함께 산책하고, 이 섬의 어두운 북쪽 지역을 방문했던 이야기나 글을 쓰는 일을 하면서 겪은 모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그는 이번 생에 그와 만날 수 없을 것을 두려워한다. 만일 그가, 그의 사람과 그, 둘 사이의 공통점에 천착해야만 한다면, 그는 그들이 마치 서로 반대쪽으로—하나는 서쪽, 하나는 동쪽으로— 항해하는 두 척의 배와 같다고 쓸 것이다. 또는 차라리, 삭구를 만지며 고생하는 갑판원들 같다고, 하나는 서쪽으로 가는 배에 탔고 다른 하나는 동쪽으로 가는 배에 탔다고 쓸 것이다. 그들이 탄 배는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서로를 지나간다. 그러나 바다는 거칠고, 날씨는 폭풍우가 친다. 그들의 눈에는 물방울이 몰아치고, 그들의 손은 삭구에 쓸려 데이고, 너무 분주해 서로에게 손을 흔들어줄 틈도 없이 서로를 지나쳐 간다.

 

각주

  1. fen; 늪지와 습지로 둘러싸인 땅. 펜(pen)과의 혼동을 막기 위해 '휀'으로 적었다. [본문으로]
  2. 시편 91편 5-7행. [본문으로]
  3. 이 부분은 원문에 sign으로 되어 있다. sign은 징후를 뜻하지만 성서에서는 기적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4. 한때 런던 시를 둘러싸고 있던 런던월(London Wall)의 문. [본문으로]
  5. 쿳시는 '적군'을 가리키는 말로 'foe'를 사용했는데, 이는 <로빈슨 크루소>를 쓴 작가 대니얼 디포(Daniel Defoe)의 원래 성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6. 창백한 말(pale horse)은 성서나 문학에서 죽음의 사자를 의미한다. [본문으로]
  7. 여기서도 쿳시는 '적군'을 가리키는 말로 <로빈슨 크루소>의 작가 대니얼 디포(Daniel Defoe)의 원래 성이기도 한 'foe'를 사용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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