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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 젠더, 퀴어이론/에세이, 수필, 강연

[번역중] 버지니아 울프 - 베넷 씨와 브라운 부인

by 소하리바 2021. 5. 14.

제가 이 강의실에서 소설을 쓰려고 노력하거나 그에 실패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한 유일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네요, 어쩌면 그게 바람직하죠. 그리고 현대소설에 대해서 강연해달라는 여러분의 초대를 받은 후에, 대체 어떤 악마가 내 귀에 속삭여 종말로 저를 이끌었는가를 자문했더니, 제 앞에, “내 이름은 브라운이야. 잡을 테면 잡아 봐”라고 말하는 인영(人影)이 나타나더군요.

대부분의 소설가들은 같은 경험을 합니다. 브라운, 스미스, 존스가 자기 앞에 나타나서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매력적인 방식으로 이렇게 말하죠, “할 수만 있다면, 이리 와서 나를 잡아 봐.” 그리고 이런 도깨비불 때문에, 작가들은 그들 인생에서 가장 좋은 나날들을 일을 하며 보내고 대개 그 대가로 아주 적은 돈을 받으면서, 글을 쓰면 쓸수록 좌절하지요. 극소수만이 그 유령을 잡고, 대부분은 유령의 드레스 천 쪼가리나 머리카락 몇 가닥에 만족해야 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주제를 넘어서는, 캐릭터의 창조라는 미끼에 걸려들었기 때문에 소설을 쓰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믿음은 아놀드 베넷의 지지를 받은 셈인데, 베넷은 자신의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픽션의 토대란 캐릭터를 만드는 것, 그뿐이다. … 스타일도, 플롯도, 세계관의 창의성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 중 어느 것도 캐릭터만큼 어마어마하게 설득력이 있지는 않다. 만일 캐릭터들이 진짜라면 그 소설은 기회를 얻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소설은 잊힐 것이다. …” 그리고 그는, 현재 우리에게는 유망한 젊은 소설가들이 없으며 그 이유는 그들이 진실되고, 진짜 같고, 설득력 있는 캐릭터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그려내기에 이릅니다.

이 질문들은 제가 오늘 밤 신중함보다는 대담함을 가지고 다루고 싶은 것들입니다. 저는 우리가 픽션에서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무엇을 의도하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군요. 베넷이 제기한 리얼리티에 대한 질문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 젊은 소설가들이 캐릭터를 창조하는 데에 실패하는 이유들을 제안해봅시다—베넷 씨의 주장처럼 그들이 실패하는 게 사실이라면 말이죠.

이로써 저는, 아주 포괄적이고 애매한 주장을 하게 될 텐데요—제 스스로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죠— 이 질문이 매우 어려운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캐릭터에 대해 얼마나 잘 모르는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예술에 대해 얼마나 잘 모르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러나 시작하기 전에, 명확성을 위해, 저는 에드워드 7세 시대 사람들과 조지 왕조 시대 사람들을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웰스, 베넷, 갈스워시를 에드워드 7세 시대 사람들로, 포스터, 로렌스, 스트라치, 조이스, 엘리엇을 조지 왕조 시대 사람들로 두지요. 그리고, 만약 제가 1인칭으로 말할 때 과도하게 자기 중심벽(I, my, me를 지나치게 많이 쓰는 버릇)이 있다고 해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고독하고, 유식하지 못하며, 이해를 잘못한 한 개인의 의견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지 않거든요.

여러분이 제 첫 번째 주장은 마지못해 인정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강의실에 있는 모든 사람은, 사람들의 성격을 파악합니다. 사람들의 성격을 읽는 것을 연습하지 않거나, 그 방면으로 재주가 없다면, 일 년 안에 곤경에 빠지게 될 테지요. 우리의 결혼과 우정은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비즈니스도 그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성격을 파악해야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매일매일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두 번째 주장을 할 텐데요. 아마도 첫 번째 주장보다 논쟁의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1910년 12월을 전후하여 인간 성격이 변했다는 취지의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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