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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사회과학/역사철학, 철학

[요약] 한병철 - 에로스의 종말 (알랭 바디우 서문 "사랑의 재발명")

by 소하리바 2021. 3. 1.

목차

     

    들어가며

    • 이 책에서 한병철이 증명해보이는 것
      • 역사의 오랜 전통 속에서 사랑에 강렬한 의미가 부여되어 왔다면 오늘날에는 바로 그런 사랑이 위협당하고 있으며, 아니면 최악의 경우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 진정한 사랑의 최소 조건을 위해서는 타자의 발견을 위해 자아를 파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 현 시점에서 타자의 실존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경험은 오직 사랑 뿐이다.

    소개

    1장

    • 영화 ≪멜랑콜리아≫, 그림 ≪눈 속의 사냥꾼들≫,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
    • 순수한 외부, 완전한 타자의 파국적 침입.
    • 그러한 파국적 침입은 주체의 정상적인 균형 상태를 깨뜨리는 재난이지만 그 재난은 동시에 자아의 공백과 무아 상태에서 오는 행복이자 결국 구원의 길임.

    2장

    • 푸코가 빠뜨리고 레비나스가 단초를 던진 데 그친 "다르다는 것의 부정성, 즉 할 수 있음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 있는 타자의 아토피아가 에로스적 경험의 본질적 성분을 이룬다"라는 테제.
    • 역량, 권력(pouvoir), 성과를 중시한 푸코를 비판함.
    • 레비나스와 부버에 대한 유보적인 찬사.
      • 레비나스와 부버는 "에로스는 성과와 할 수 있음의 피안에서 성립하는 타자와의 관계"임을 어렴풋이 인식했다.
    • "타자는 오직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사랑의 경험은 불능에 의해 만들어지며, 불능은 타자의 완전한 현현을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임.

    3장

    • 헤겔에게서 사랑의 힘이 절대자의 새로운 척도임을 발견. (절대적인 부정성이 없다면 절대자도 없다)
    • 진정한 사랑은 타자가 도래하기 위해 정신이 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임.
      → 정신이 자기소멸의 경험을 받아들이고 "죽음 속에서도 스스로를 유지해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 속에서뿐임.
    • 바타유 "에로티즘이란 죽음 속에 이르기까지 삶을 긍정하는 것"

    4장

    • 아감벤과 보드리야르의 논의.
    • 포르노는 에로스의 비속화일 뿐임.
      •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전시하고 구경거리로 만듦으로써 사회의 포르노화 경향을 강화한다. 자본주의는 성애의 다른 용법을 알지 못한다. 에로스는 포르노로 비속화된다."
      • → 오직 사랑만이 에로틱한 것 또는 섹스가 전시되지 않고 제의화될 수 있도록 한다.

    5장

    • 에바 일루즈, 플로베르, 바르트
    • 사랑 속에는 타자에 관한 환상이 풍부하게 담겨 있음.
    • 사랑이 종말에 이른 이유는 오늘날의 세계가 규격화되고 자본화된 '동일성의 지옥'이기 때문임.
      •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장벽, 경계, 배제는 차이의 효과가 아니라 동일성의 효과임.
      • "돈은 모든 것을 동일하게 만든다. 돈은 본질적 차이를 지우고 평준화한다."
      • "돈은 새로운 경계를 배제하고 쫓아내는 장치로서 타자에 대한 환상을 철폐한다."

    6장

    • 사랑과 정치의 연관 관계 - 플라톤의 역동적 영혼관에 대한 분석
      • 영혼을 이념으로 인도하는 것은 사랑이며 그 정반대 쪽에는 "피로사회"가 있다.
      • 알랭 바디우 "사랑은 둘의 무대라는 점에서 사랑은 정치의 최소한의 모체"
    • "에로스는 완전히 다른 삶의 형식, 완전히 다른 사회를 향한 혁명적 욕망으로 나타난다."
    • "에로스는 도래할 것을 향한 충실한 마음을 지탱해준다."

    7장

    • 사랑은 사유 자체의 필수적 조건: "오직 친구 혹은 연인이었던 사람만이 사유할 수 있다"
    • 사랑의 사멸과 함께 사유도 파괴된다.

    알랭 바디우가 본 에세이의 확장성

    • 이 에세이는 타자성에 대한 숭고한 찬가 / 소진되고 개별화된 현대 주체 "우울한 나르시시스트"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
    • 타자에 대한 소비주의적이고 계약주의적인 관계의 반대편에 올 수 있는 것이 오직 타자에게로 들어가는 통로를 열기 위해 자아를 파기한다는 거의 도달 불가능한 숭고성뿐일까?
    • 반복적인 개인적 만족감이라는 조악한 긍정성에 맞설 수 있는 것이 오직 절대적 부정성뿐일까?
    •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신의 죽음 이후에도 이 길을 여전히 따라야 할까?
    • 나도 타자의 것도 아닌 세계 즉 유일한 개별자로서의 "우리 둘"에서 출발하여 세계를 건설한다는 전망이 자신의 길을 열지도 모른다.
    • 충실한 사랑이란 진정한 공유를 위한 두 망각 사이의 결합이며 애써 힘겹게 보편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둘의 교합일지도 모른다.
    • 이 에세이를 읽음으로써 우리는 오늘날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투쟁들 중 하나―'사랑의 수호' 또는, 랭보의 말처럼 '사랑의 "재발명"을 위한 투쟁―에 명확한 의식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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