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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사회과학/사회학, 경제학

[정리] 토마 피케티 <자본과 이데올로기> 제1부 1, 2장

by 소하리바 2021. 4. 30.

목차

     

    이 책은 사회학 연구자가 번역을 한 책이어서 번역의 질이 높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읽어 보면 상당히 졸음이 쏟아진다. 한국어의 특성에 반해서 명사 형태 위주로 끊어진 어절들이 많아서 그런지 문장이 잘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읽기 힘든 책이어서 아쉬웠다. (예를 들면 ‘이 사회는 유동적이다’가 ‘이 사회에서는 유동성이 확인된다’가 되는 식.) 저자의 원 의도를 해치지 않으려는 느낌이기는 했지만, 정치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선행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 같은 일반 독자들에게는 안 그래도 모르는 단어가 많은데 호흡까지 끊겨서 참 읽기 어려운 책이었다. 피케티가 대시(dash)나 괄호 구를 많이 쓰는 편이라, 문장이 더 끊겨서 읽힌다. 서구에서 쓰여진 책이라면 다 그렇겠지만 영어나 불어 능통자는 영문본이나 불어본으로 읽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이 글에서는 ‘제1부: 역사에서의 불평등주의체제들’에서 ‘제1장 삼원사회’와 ‘제2장 유럽 신분사회’를 요약했다. 이 두 장이 책 전체의 피케티의 논지를 이해함에 있어서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부디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 중간중간 참고하기 편한 자료로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제1장 삼원사회: 삼기능적인 불평등

    이 책에서 제일 짧은 장이다. (서론이 이 장보다 길다) 피케티는 이 장에서 사제, 귀족, 제3신분으로 나뉘었던 삼원사회를 소개하고 있다. 가장 앞부분에서 이를 소개하는 이유는 삼원사회라는 개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피케티에 의하면 삼기능 도식은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가장 널리 퍼진 불평등주의체제의 범주를 구성하고,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게다가 더 중요한 것은, 삼기능사회가 소멸되는 과정에서 국가적, 지역적, 종교적, 식민적, 탈식민적 맥락에 따라 극도로 가변적인 조건들에 의해 인류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는 점이다.

    사제는 일명 지식인 엘리트로, 지적이고 종교적인 계급이다. 공동체의 영적 지도와 교육을 책임진다. 지적이거나 도덕적인 좌표도 이들로부터 나온다. 귀족은 일명 전사 엘리트로, 사회 전체의 안위를 지키고 사회를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제3신분은 노동하는 평민 계급으로, 노동으로서 사회 공동체의 의식주를 책임진다. 물론 실제로는 좀더 복잡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유형을 정당화하는 일반적인 도식은 삼기능 도식을 취한 ‘삼기능사회’다. 이 삼원 도식은 세계 전역에서 확인된다. 토테미즘 이후로 세계에서 말해지는 종교(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등)의 형태를 겪은 적이 없는 한반도에서는 역사적으로 낯선 개념이다.

    피케티는 삼원사회가 이후 역사적 형태와 두 가지 본질적인 특성에 의해 구별된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는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삼기능 도식이다. 다른 하나는 이 구래의 사회가 중앙집권적 근대 국가 이전에 존재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사회에서 불가분한 정치/경제적 권력이 처음엔 국지적 수준에서 먼 곳의 중앙 권력과 느슨한 연결을 갖고 집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지방분권화된 사회들은 근대 중앙집권적 국가들과는 다른 모습을 띤다.

    삼원사회의 권력관계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제와 귀족은 소유계급이며, 이들이 대부분의 농토를 보유하고 있고, 이 소유지가 모든 농촌 사회에서 경제/정치적인 권력의 초석이라는 점이다. 또한 이 소유권이 공동체의 질서 유지와 치안, 군사 권력, 재판 권력이라는 점에서 왕권적인 핵심 권력과 병행한다는 것이다. 이런 권력관계는 강제노동과 예속이라는 극단적 형태를 보여주는데, 다시 말해 노동자들은 엘리트 계급 영주들에게 ‘속해’ 있다. 이 소유관계는 노예제사회와는 다른 형태다. 또 두 엘리트계급이 역할을 분담해 준국가를 형성한 사회라면 결혼, 출생, 사망을 통제하고 등기를 관리하는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고 이는 사제계급이 일반적으로 전담하는 사회적 규범이나 규칙 등과 긴밀히 연관된다. 피케티는 여기에서 사제와 귀족이 보유한 이러한 왕권적인 권력은 안위와 영성, 공동체의 구조화라는 측면에서 제3계급에게 제공하는 보상적 봉사로 간주된다는 점을 중요하게 짚는다.

    중앙집권화된 근대국가의 발전으로 삼원사회의 권위는 실추되었지만 그 과정은 실제로 우리 생각보다 복잡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삼원사회의 산물이 근대국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해내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소유주의 이데올로기, 식민주의 이데올로기,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경합하는 이데올로기 양상의 전개로 이어지면서 삼원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대체하거나 소멸시켰다. 귀족과 사제가 사회에서 맡았던 역할들이 근대의 인적수단들로 옮겨가면서 그 권위가 실추된 것이다. 이 과정은 점진적일 수도 있고 어떤 시기에는 급속히 진행됐을 수도 있는데, 피케티는 후자를 보여주기 위해 프랑스 대혁명을 주로 다룰 것이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삼기능 도식

    피케티는 현대인인 우리의 시각으로 삼원사회를 섣불리 ‘불평등하고 자의적인 질서’로 바라보는 것을 피하도록 조언하는데, 이는 사제계급과 귀족계급이 공동체의 의미와 안보에 대한 욕구를 해결해주는 조직으로서 기능했기에, 주민들이 보기에는 이 질서가 정당해 보였던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물론 세 집단 사이의 권력 또는 자원 분배에 대해 이들이 확실하게 합의를 본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세 집단이 각각 특정 기능을 맡았고 이 분담이 공동체에 이익이 된다는 아이디어는 분명 통했고, 그로써 불평등이 정당화되었다는 것이다.

    엘리트의 다중성과 인민의 단일성

    엘리트들은 그 수에 관계없이 다중적이며 반대로 인민들은 단일적이라고 여겨진다. 일단 사제들은 독신주의와 재생산 측면에서 다른 두 집단과 구별될 수밖에 없었고, 또 사제와 귀족은 계속 경합을 벌여왔다. 그러나 삼원사회는 노동자 전체를 단일한 계급이나 위상이나 위엄으로 통합한다는 관념에 입각하는데, 실제로는 그보다 복잡했더라도 마찬가지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서 훨씬 더 복잡했다.) 최하위 집단과 중하위 집단 사이에서 존재하는, 신분, 종교-인종적인 서로 다른 기원과 연결된 다양한 불평등은 현대의 불평등에서도 계속 나타난다.

    유럽과 그 외의 삼원사회들

    유럽의 삼원사회는 세계적으로 볼 때 ‘보편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일단 피케티는 프랑스와 여타 유럽에서의 삼원사회의 진화 과정을 상세히 분석하고자 했고, 서구 열강의 노예제와 식민주의 지배체계에 영향을 받은 유럽 외 국가들도 다룬다.

    제2장 유럽 신분사회: 권력과 소유

    중세시대 삼기능 질서를 정당화하는 일반적인 도식과, 앙시앵레짐기 사회에서 귀족계급과 사제계급의 인구 수 및 재정적 진화, 삼기능 이데올로기가 소유관계와 경제 법규의 정교한 양식 속에서 구현되었던 방식을 탐구하는 장이다.

    삼기능질서의 정당화

    중세 기독교사회는 반란에 대한 공포로 인해 안정 욕구가 컸기에, 소유계급은 사회적 위계를 정당화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쏟았다. 이들은 반란을 일으킨 제3계급의 손발을 자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인민을 통일시키는 일만큼이나 엘리트들이 자기의 역할을 잘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했는데, 사제들과 귀족들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장려되었다.

    경제학자 마티외 아르누에 의하면 이렇게 계층을 삼분시키는, 다시 말해 노동자계급 안의 동등함을 인정하는 삼기능도식이야말로 노예와 농노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강제노동을 종식시킬 수 있었는데, 이로써 중세에 비약적으로 인구가 증가했다는 것이다. 아직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 노예가 많았던 11세기를 거쳐 1350년경 서유럽에서는 노예는 미미하게 남았고, 농노는 거의 사라진 것으로 관찰되는데, 이들의 민사상 인격적 권리에 대한 강한 인정은 세 신분을 찬양하는 이데올로기가 일반화되는 1000-1350년 사이에 점차적으로 확립되었다. 아르누는 자유노동으로의 진화가 흑사병 이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았는데, 유익한 생산적 협업을 발전시키는 십일조, 시장, 방앗간 등의 제도가 세 계급 간의 새로운 동맹으로 인해 가능해졌다는 것이고, 이로 인해 위기를 넘어서 농업생산량의 급격한 증대와 인구 폭증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프랑스 앙시앵레짐하에서 교회는 모든 토지에 부과했던 십일조라는 형태의 조세로 동작했는데, 이 정치적인 조세재정제도로 사회를 규제하고 규범을 세우는 수단들을 활용하면서 사실상 준국가로 변형되었다. 십일조로 지어진 공동 곳간, 학교 등의 공공재는 노동자들에게 혜택을 주었다. 이러한 점에서 삼원사회 안에서의 교류와 지배관계는 상당한 복잡성을 띤다.

    프랑스 사제와 귀족 인구 수의 감소

    앙시앵레짐기 프랑스의 인구 수를 측정하는 데에는 많은 불확실성이 따르지만 피케티와 연구진은 인두세나 삼부회에 소집된 영주 명단 등을 활용해 통계를 내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프랑스 군주제의 마지막 몇백 년 동안 사제와 귀족 수가 이전보다 적었고,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7세기 하반기부터 시작해 18세기 내내 상당히 감소했다는 것이다. 18세기 말에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했고 거대한 사회변혁이 일어났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무시할 수 없는 지점이다. 대대적으로 인구가 증가했던 시기이므로 절대적인 숫자를 잘 살펴야 하지만, 18세기에는 절대적 숫자마저도 줄었다. 총인구가 아닌 성인남성 인구로 따지면 17세기에는 성인 남성 인구의 3.3%였던 사제 수가 18세기 동안에는 2% 미만으로, 20세기 말부터는 천 분의 일 수준으로 떨어진다.

    피케티가 파악한 귀족 및 사제계급 감소의 원인에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프랑스 군주정이 17세기말-18세기초에 세수 확보를 위해 귀족 인원을 제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또한 18세기 귀족들이 자발적으로 맬서스주의적인 자녀계획을 가지고 있었음이 드러나는데, 자녀 수도 줄었을뿐더러, 장자상속으로 인해 재산을 받지 못했던 차자들은 결혼을 덜했다.

    프랑스에서 두 엘리트계급의 부의 집중

    어쨌든 대혁명 전야에 부나 정치경제적 권력은 두 지배계급에 극심히 집중되었다. 1780년경 총인구의 1.5%에 불과했던 귀족과 사제는 왕국에서 토지의 절반을 보유했고, 십일조를 포함시킨다면 무려 55~60% 수준이었다. 피케티 연구진은 이들이 가졌던 부를 파리 시민의 상속분을 가지고 분석했다. 대혁명으로 교회재산이 몰수되고 십일조가 즉각 폐지된 후 1810년까지 파리 시민의 상위 0.1% 상속분에서 귀족의 몫은 1780년 50%에서 25%까지 줄었고 1810~1850년에는 다시 상승해 40~45%가 되었다가 1850~1910년에 10%가 된다. (1814~1815년: 프랑스 왕정복고기, 1815~1848년: 납세유권자 군주정 기간) 귀족들이 대혁명기 망명했다가 왕정복고기에 돌아와 납세유권자 군주정 기간에서 귀족으로서 유리함을 누렸다고 보았다.

    소유조직으로서의 교회

    피케티 연구진은 가톨릭교회는 1780년대에 프랑스 토지의 약 15%, 십일조를 포함해 약 25%를 보유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 자료가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스페인, 에티오피아 등에서도 교회가 많은 소유를 확보했음이 드러난다는 것은 확실하다. 21세기 초 현대의 국가들에서 교회 이외의 여타 단체들까지 포함한 비영리기구들이 전체 소유의 극소 비율(프랑스 1%~미국 6%)을 차지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어마어마한 수치다. 앙시앵레짐기 교회는 사회를 발전시키고 틀을 짜는 기획을 실행하는 조직이고 견고한 세습적 기반 위에서 비로소 성공적으로 시행되었다. 최근 연구들에서 소유자조직으로서 교회의 발전은 경제나 금융에 관련한 중세 법의 성립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한다. 또한 피케티는 교회의 교리들이 종교조직이자 자산가조직으로서 교회의 영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수 세기에 걸쳐 소유권을 다듬어왔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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