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추방
[62] 제자들의 설명은 이렇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언어를 망각하게 된 까닭은 그들이 한때 부여받은 땅에서 쫓겨난 이유와 정확히 일치한다. 즉 그들은 그 땅에 살고 그 언어를 쓸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그들은 단지 지리학적으로만 추방당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언어학적으로도 추방당했다. 그리고 이 추방으로 인해 그들은 태곳적에 신께서 당신을 계시하시던 [목]소리로부터 돌이킬 수 없이 멀어지고 말았다. (…)
언어가 추방당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 [63] 추방당한 작가와 추방당한 언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 후자의 추방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
[64] 이 제자들은 그들에 앞서 혹은 그들 이후로 누구도 보지 못한 한 가지 사실을 파악했던 것 같다. 그것은 언어 역시 기원의 장소에서 추방당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언어는 한때 그것이 가졌던 부유함을 완전히 잃은 후에도--어쩌면 잃었기 때문에--여전히 성스러운 것으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 [65] 그러니까 결국 추방이 언어의 진정한 고향이며, 언어를 망각할 때가 [오히려] 언어의 비밀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인 셈이다.
7장: 끝장
[66]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언어가 '죽는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사실] 이 용법은 비교적 최근의 것이며, [훨씬 전부터] 언어에 대해 성찰해왔던 서구의 많은 문화들은 이 표현을 알지 못했다. (…)
[68]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언어의 탄생과 죽음을 묘사하고, 언어의 시간을 필멸하는 존재의 삶의 시간life span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제출된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
[69] 스페로니 이후 이 비유는 점점 더 일반화되었고, 불과 몇 십년 지나지 않아 고전어와 근대서 사이의 유사성 및 차이에 관한 성찰에서 기초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 "언어들 가운데 어떤 것은 살아 있고 어떤 것은 죽었다. 죽은 언어는 다시 두 종류로 나뉜다. 첫번째는 완전히 죽은morte affatto 언어라 부를 수 있고 두번째는 반쯤 살아 있는mezze vive 상태의 언어라고 부를 수 있다." (…)
(…) 이제는 모든 언어를 살았는지 죽었는지 여부로 나눌 수 있게 되었다.
[76] 언어의 죽음을 초래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현상들은 너무나 다양하며, 그래서 이 분야의 전문가들은 생각보다 훨씬 큰 어려움에 맞닥뜨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79] 한 언어학자는 (…) "(…) 만약 당신이 한 언어의 최후의 화자라면, 당신의 언어는--의사소통의 도구라는 점에서는--이미 죽어 있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언어학적 사망의 구조는 보기보다 훨씬 복잡한 것이 된다. [언어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공식적인 발생 시간보다 앞서 이미 일어났었던 것이 된다.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날에는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방드리도 볼리 펜트리스라는 (…) "(…) 그러나 정말로 그 언어는(콘월어는) 그녀가 죽을 때 함께 죽은 것일까? 늙은 돌리는 이 언어를 쓰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어떤 언어가 [제대로] 말해질 수 있으려면, 최소한 두 사람은 있어야 한다. 그렇[80]다면 콘월어는 그녀에게 대답할 수 있는 마지막 사람이 숨을 거둔 순간에 이미 죽은 셈이다." 이에 반해 테라치니는 (…) 사멸이라는 서글픈 운명에 처한 일인어에 대해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 노인의 죽음 이후로도 오랫동안 비우 지방의 방언은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 (…) "나는 잘못 생각했다. 10년 후 (…) 내가 만난 노인은 죽었고, 그와 함께 그의 모든 이야기들도 영원히 묻혔다. 그럼에도 유령 언어는 계속 살아 있었다. 심지어 나는 노인이 했던 일이 그의 손자, 손녀 그리고 제자들을 통해 일종의 부활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유령 언어가 완전한 끝에 다다르는 "어느 시점"이란 무엇일까? [81] (…) 그 순간을 포착하려 했던 전문가들도 결국에는 언어가 실제로 사라지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게다가 엉뚱한 시점을 가리킬 수밖에 없었다. (…) 언어의 죽음을 말하는 모든 자료는 언어의 건강과 질병에 관한 전문가들이 생각하기 싫어하고 완고하게 배척하는 한 가지 가[82]능성을 증명한다. 그 가능성이란 언어에는 끝장dead ends나는 순간이 없을 수 있다는 것, 끝없이 흘러가는 언어의 시간은 생명체의 시간과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8장: 문턱
[83] 대개의 경우 언어의 소멸은 급작스럽지 않고 점진적이며, 시작되는 시점에는 대부분 감지할 수 없는 까닭에 오히려 치명적일 수 있다. (…) [84] 테라치니에 따르면, "언어가 죽는다는 것은 다른 언어로 변한다는 뜻이다." (…) 사람들이 죽음의 순간이라 여기는 것은 많은 경우 사건이 아니라 문턱인 것 같다.
(…) 언어의 변화는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의 이행을 분명히 표시하는 변별[85]점을 허용하지 않는 데 그치지 않는다. (…) 언어의 영역 안에서 제 모습을 바꾸는 것은 언어의 어떤 부분과 어떤 지점들인가?
가령 세르킬리니가 계발적인 분석을 보여준 바 있는, 라틴어에서 프랑스어로의 이행을 생각해보라. 이 고대어에 고유한 특성을 내립조 체게에서 찾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 언어의 근대 계승어가 출현한 시기를 1세기에서 5세기 사이로 추정할 것이다, 그러나 라틴어의 핵심을 동[86]사 체계에서 찾는 사람이라면 5세기에서 10세기 사이 어디쯤에 이행의 결정적인 계기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87] 언어의 출현--혹은 소멸--을 기록할 만한 의식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일반적이고 타당한 기준은 어떤 것일까?
[88] '삶'과 '죽음'이라는 용어는 아무 쓸모가 없어 보인다. (…) 언어의 시간은 분할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것이며, 이 시간 속에서는 발생과 소멸이 서로 별개의 계기들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89] (…) 언어가 "결코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는 것 (…)
[90] 우리는 언어에 변화 가능성이 내재해 있다는 인식이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결론, 즉 언어는 결코 "순결을 지킬" 수 없다는 결론에 직면하여 눈에 띄게 후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언어가 순결을 지킬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변화하는 한에서만 지속하기 때문이다.
[91] 언어의 시작과 끝은 "계속적인 변화" 속에 있는 두 가지 계기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 변화를 통해 모든 언어는 화자들에게서 "도망치고" "제 모습을 바꾼다." 이 두 개의 소실점fleeting point에서 화자들은 (…) 문득 깨닫는다. "하나의" 언어는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그 자신으로서 존재하기를 멈춘다는 (…) 것이다. (…) 「스트라스부르 서약」의 저자들은 자신들이 프랑스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 혹은 라틴어를 이미 잊어버렸다는 사[93]실을 의식하고 있었을까?
따라서 언어의 덧없는 흐름을 멈추거나 늦추려는 모든 시도는 헛되다. (…) 언어가 이미 내던져버린 형태를 보존하려고 애쓰는 그런 노력들은 기껏해야 허망할 따름이다. 우리 시대에도 언어는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절반씩" 변화하고 도망치고 제 모습을 바꿀 것이다. 왜냐하면, 단테가 적었듯이, 언어는 "결코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없으며," 저 에세이스트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가 원하는 원하지 않든 "매일" 우리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시간을 제 요소로 가진 덕분에 본질적으로 가변적인 언어는 완전히 소유될 수 없고, 그러므로 또한 완전히 상실될 수도 없다. 언어는 언제나 이미 망각된 것이므로 결코 기억될 수 없[94]다.
9장: 지층
[95] 한 언어가 다른 언어로 이행하는 과정에는 (…) 항상 무언가가 남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언어는 화자보다 더 많은 것을 간직하고 있으며, 마치 생명체보다 오래된 역사의 지층들로 이루어진 광물 판mineral slate처럼 지나온 세월의 흔적들을 지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가 역사의 아카이브"라면, 랠프 왈도 에머슨이 적었듯이, 그것은 관리인이나 보관 목록이 없는 아카이브다.
[96] 야콥 호르네만 브레스도르프는 언어에 대한 이와 같은 지질학적 개념에 기초하여 (…) 시간에 따른 언어의 변화는 그 언어를 쓰는 민족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역사적인 변화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97] (…) 브레스도르프의 생각에 따르면, 민족들 간의 접촉에서 한 민족의 언어는 다른 민족의 언어 앞에서 굴복하지만, 자신을 대체한 바로 그 언어 안에서 계속 생존할 수 있다. (…) 다른 언어 안에 지속적으로 잔존하는 요소,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외관상 매끄럽게 이행하는 과정에서도 잊혀진 채로나마 비밀스럽게 간직되는 이 요소에 브레스도르프가 붙인 이름은 '기저층substrate'이다.
[98-2] 하나의 단일 언어를 구성하는 '지층'의 수는 많고, 각 지층이 지닌 형식과 중요도는 서로 다를 것이다.
[104-2] 언어는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을까? 기저층 이론가들의 주장을 따른다면, 고대 언어는 사라진 이후에도 여전히 저력을 발휘하면서 잔존한다고 볼 수 있다.
[106] 한 언어가 시간차를 두고 다른 언어에 영향력을 미치는 현상에 대해서 수많은 설명들이 제출되었다. (…) "억압당하던 사회계급"의 부흥 (…) / 무릇 모든 언어적 변화는 본질상 천천히 점진적으로 일어난다는 주장 (…)
[107] 한 언어가 지나온 세월은 복원과 재현/재연representation을 거부한다. (…) 언어의 단층 및 균열에 맞닥뜨린 화자speaker와 학자는 (…) 분별력을 뽐낼 수 없다. 왜냐하면 언어[108]의 '잠복기'는 시작도 끝도 모르며, 모든 언어들이 움직이는 연속체continuum 안에서는 궁극적으로 적합과 부적합, 발생과 소멸 따위를 확실하게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연속체 안에서 차이와 반복은 점점 더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언어의 지층들은 너무나 많고 다양해서 이들의 끊임없는 변화의 리듬은 결코 한꺼번에 지각될 수 없다.
10장: 변환
[109] 때로는 한 언어 안에 다른 언어의 흔적이 너무 많아서 그것이 정말로 '하나의' 언어인지 의심이 들 때도 있다. 이에 대한 가장 두드러지는 사례는 정치적/문화적/사회적으로 주변적인 언어 형식들에서 볼 수 있다.
[112] 언어학적 잔존의 본성과 범위를 평가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전문가들의 견해는 상당히 갈린다.
[113] 한 언어를 구성하는 지층들의 본성과 범위에 관한 성찰은 궁극적으로 엄밀한 의미에서 언어학적인 물음이 아닌 철학적인 물음에 직면하게 되며, 하나의 언어라는 개념 자체와 씨름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문들이 열띤 논쟁으로 비화하는 것은 문제의 언어학적 대상이 민족어라는 정치적 집합의 공식적인 언어가 되는 순간이다. 하나의 단일 민족을 표상하는 임무를 받은 언어는 분석과 조회identification의 작업에 매우 저항적일 수 있다.
[116] 성서 민족의 언어는 유형론과 발생론의 측면에서 공히 이스라엘 국가의 그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이 두 언어 모두에 똑같이 붙어 있는 "히브리"라는 언어명glottonym은 두 언어를 가르는 근본적인 특성을 은폐할 따름이라는 것이 웩슬러의 주장이다. (…) 이스라엘 민족어의 출현은 고대 성서 언어의 '부활'이 아니며, 그것의 연속은 더더욱 아니라고 웩슬러는 주장했다. (…) 이 현대 민족어가 탄생할 때 발생한 복잡한 과정에 이 언어학자가 붙인 이름은 "부분적 언어 변환partial language shift"이다.
[119] 혹시 언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단일 집합의 구성원으로 표상되기에는 너무나 많고 또 너무나 다양해서 오직 층들의 끊임없는 변환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언어에는 유동하는 부분 외에 다른 부분은 없다. 그리고 한 언어를 언어로 묶어주는 유일한 응집력은 계속해서 변화하는 여러 방법들을 통해 그 언어를 이전 언어와 결합 혹은 분리하는 기억과 망각의 층 속에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의' 언어를 어떤 무정형의 덩어리, 그 안의 여러 층들이 제가끔 이전에 망실된 층들이 남겨놓은 지각 가능한 혹은 불가능한 부재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어떤 덩어리로 볼 수 있다. 즉 언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속 그것에게서 빠져나간 것들로 이루어진, 말하자면 변환의 총체sum인 것이다.
11장: 작은 별
[122-2] 언어들 간의 유사성을 지목하는 것과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 [123] 언어들 사이의 반향에 대한 고찰이 반드시 반향의 원인에 대한 고찰과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첫번째 물음은 구조에 관한 것이고, 두번째는 역사에 관한 것이다.
[128] 인도-유럽어학 (…) 분야에는, 장-클로드 밀네가 보여주었듯이, 단 두 개의 공리밖에 없다. (…) 첫 번째 공리는 언어들 간의 유사성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이 원인이 언어라는 것이다.
[130] 근대 민족어 사전들은, 물론 각각 정도 차는 있지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텍스트 연구라는 원칙에 기초하여 단어의 역사를 보여준다. 사전의 각 항목들은 다양한 자료를 통해 해당 단어의 최근 용법에서부터 더 이전 용법으로,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기록된 자료상으로 가장 오래된 용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반면 인도-유럽어 어원학은 텍스트를 거의 참조하지 않는다. (…) 전통적인 사전에 쓰인 용어들과 달리 인도-유럽어 어휘에서 '재구성된' 각 요소들은 불가피하게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므로 본질상 구성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인도-유럽어 [131] 학자들은 학문적인 글쓰기 관행을 개혁할 수밖에 없었다. (…) 학자들은 자신들이 '재구성한' 용어를 등재시키는 과정에서 이 단어의 본성을 규정하는 바로 그 특성--다시 말해 본질상 증명될 수 없을 것이라는 특성--을 제거해야 하는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근원-형식은 인용되[어 쓰이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 다른 형식들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오비게 되었다. 증명되지 않았고 될 수도 없는 이 데이터는, 자신을 창안한 자들이 본래 의도했던 바와는 전혀 다르게, 명명되는 순간 이미 이전 가설 상태의 순수한 가능태에서 벗어나 증명이라는 확실한 토대에 발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 분야의 초창기 학자들은 (…) 재빨리 이 문제를 회피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애스터리스트asterisk, *, 혹은 이 장치를 만든 독일의 장인들이 쓴 표현을 따르자면 "별der Stern"이라는 인쇄술적 장치였다.
슐라이허는 (…) 적었다. "* 표시는 추론된 형식을 가리킨다." 이때부터 '재구성된' 형식은 첫머리에 * 표시를 달고 등장하게 되었다.
[133] 애스터리스크는 자신을 달고 있는 단어가 어떤 형식의 역사적인 계보를 설립하는 데는 필수적이지만 그 자체로는 증명 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애스터리스크는 해당 단어가 언어학자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 다시 말해 현존하는 어떤 언어적 전통 안에도 존재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136] 문법학자들에게 칼표는 이미 오래전에, 말하자면 영면에 든 다른 언어에 기원을 둔 단어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반면 칼표와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애스터리스크는 죽지도 태어나지도 않은 언어, 두 문헌학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언제나 이미 "상실되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언어에 속한 단어를 표시한다.
[138] 인도-유럽어 문헌학의 200년 역사가 잘 보여주는 것처럼, 애스터리스크라는 형식은 아무[139]리 실증적인 용어를 동원하더라도 결국에는 순전히 가설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을 표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 만약 공통의 특성이 동일한 유전 형질에 의한 결과라는 것을 의심의 여지 없는 사실로 확정하고 싶다면, 존재하지 않았어도 존재했어야만 하는 영향 관계를 발명해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역사언어학의 본질은 "최초의 언어가 무엇이냐?"는 물음이다. 애스터리스크는 존재하지 않는 언어를 추정하여 만들어낸 근원어 앞에 붙이는 것이 작은 별이다.
12장: 별빛 돌아오다
[142] 촘스키가 제시한 사례들은 (…) 비문법적인 문장도 다수 포함하고 있는데, (…) 왜냐하면 이렇게 [인공적으로] 고안[143]된 표현들이 있어야만 자신이 제안한 통사 규칙의 타당성을 검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이후 거의 곧바로 새로운 기능의 애스터리스크가 쓰이게 됐다. 촘스키와 함께 작업한 언어학자들은 앞에서와 같은 불가능한 표현들에는 전부 애스터리스크를 붙이기 시작했고, 이 별은 변형-생성문법 언어학의 공식 표기법에서 금세 확고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해서 애스터리스크는 1950년대부터 공시적 언어학의 표준적인 특징이 되었다.
그러나 언어학적 '재구성'의 역할을 맡았던 엣 별 역시 역사언어학 안에 여전히 잘 살아 있다. 오늘날 언어학 관련 저서에서 두 가지 애스터리스크 중 하나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 이 상징의 진짜 정체를 확실히 알려면 먼저 책을 쓴 학자의 입장이 언어학의 어떤 패러다임에 속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 어떤 의미에서 이 기호의 두 가지 쓰임새는 완전히 상반된다고까지 [144] 말할 수 있다.
[144-2] 미시건 언어학 연구소의 하우스홀더는 강의에서 현대적인 의미의 애스터리스크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 하우스홀더는 "이 장치는 가장 기이하고 부적절한 종류의 문장들에 쓰여왔다"라고 적었다. 그에 따르[145]면, 한 가지 표현에 붙은 애스터리스크는 최소한 세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146-2] 모든 언어학적 증명을 떠받치고 있는 근본적인 구별 자체가 검증될 수 없다(…). 주어진 언어 안에서 어떤 표현이 문법적인지 아니면 비문법적인지의 여부를 증명할 수 있는 기준은 (…)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 문법 내부에서 발화 가치를 검증하려고 할 때 우리가 최종 분석의 차원에[147]서 의지하는 것은 결국 "원어민의 언어 직관linguistic intuition of the native speaker"이다.
[147] 이 학문은 과학적인 증명이라는 목표를 설정하고서, 우리가 한 언어 안에서 가능한 것과 -
[148] 오직 이 작은 별만이 우리로 하여금 확신을 갖고서 단일 언어라는 바다를 항해할 수 있게 해준다.
애스터리스크는 가능하지만 문법적으로 틀린 문장, 즉 없는 것을 가리킨다.
13장: 글 쓰는 소
[156] 조지프 브로드스키도 잔존하는 언어를 불러낸 적이 있다. (…) 그가 이 언어를 소환한 방식은 (…) 정치 이론가보다는 글 쓰는 소의 방식에 가까운 것이었다. "(…) 이 글줄을 쓰는 저라는 사람은 언젠가 존재하기를 그칠 것입니다. 이것을 읽는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글줄이 쓰여지게 한 언어,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것을 읽게 하는 언어는 남을 것입니다. 단지 언어가 인간보다 오래 지속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언어가 인간보다 더 잘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언어가 잔존하는 것은 한 개인 혹은 한 공동체의 의지에 의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누구도 '의식적으로' 언어를 간직하거나 내버릴 수 없다. (…) 언어가 궁극적으로 화자가 부재한 상태에서도 지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언어가 화자를 무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화자를 방편으로 삼아 언제나 이미 스스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즉 언어가 본질상 자신을 쓰는 존재보다 "더 잘 변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자가 있든 없든 언어는 남는다. 그러나 그 자신으[157]로 남는 것은 아니다. 언어는 지속할 수 있다. 그러나 오직 다르게만. 이 주장은 오비디우스의 우화에 최종적인 의미를 부여해준다. 그것은 변신이 궁극적으로 무든 언어, 모든 말 하나하나의 매체라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님프가 아니게 된 님프가 발굽으로 모래 위에 남긴 글자들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이다.
14장: 부족한 동물
[160] 알-자히즈는 이렇게 적었다. "모든 지적인 능력과 명민한 감각을 가지고 수많은 분야에서 온갖 훈련을 받아 압도적인 지식을 쌓은 인간이라 한들, 동물들이 자연스럽게 해내는 일을 해낼 수는 없다." 훈련이 아무리 도움이 된다 해도 그것은 수업도 학교도 교육도 없이 저절로 꽃피는 동물의 지혜에 필적할 만한 것을 인간에게 주지 못한다.
[161] "인간은 어려운 일을 해내면 그보다 덜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게 되는 능력을 지니고 태어났다." (...) "(...) 다른 종들은 저마다 제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인간, 최고도로 숙련된 인간이라도 결코 따라 할 수 없는 행위를 해낼 수 있지만, 그와는 다른 더 쉬운 행위는 하지 못한다."
[162-2] 언어학자들은 언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실패의 다양한 형태, 즉 언어의 왜곡, 생략, 소멸 등을 탐구함으로써 이 대상의 전모를 밝혀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에 거듭 의지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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